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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창고/그때 그시절

그때 그시절-화신백화점 이야기-

...백화점 아래층에서 커피의 알을 찧어 가지고는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는 내 모양을 어린애답다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을 또 즐기면서 이것이 생활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싸늘한 넓은 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그제까지 생각하는 것이 생활의 생각이다. 벌써 쓸모 적어진 침대에는 더운 물통을 여러 개 넣을 궁리를 하고, 방구석에는 올 겨울에도 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고 색전등으로 장식할 것을 생각하고, 눈이 오면 스키를 시작해 볼까 하고 계획도 해보곤 한다...


이효석이 1938년 12월《조선문학독본(朝鮮文學讀本)》(조선일보사 발행)에 발표한 <낙엽을 태우면서> 중 한 구절이다.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향토색 물씬 풍기는 소설의 작가가 쓴 글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현대적이고 도회적인 내음이 물씬 풍기는 글이다. 이효석이 한적한 가을날 낙엽을 태우면서 백화점에서 갓 볶아낸 커피 향을 떠올리거나, 눈이 오면 스키를 시작할 계획을 짜고 있던 이 때, 1930년대 후반은 우리가 세 끼 먹을 음식, 담을 그릇조차 부족했던 어려운 시절로 알아왔던, 일본이 한창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깃발 아래 조선을 병참 기지화하며 악랄한 수탈을 거듭하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일단 식민지의 현실이란 이와 같은 근대적 소비문화 또한 품고 있었다고 받아들이자. 또한 이효석은 경성제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서구지향적 모더니스트로서 “빵과 버터 등의 음식, 커피, 모차르트와 쇼팽의 피아노곡 연주, 프랑스 영화감상을 즐겼고 서양 화초가 가득한 붉은 벽돌집에서 생활하며 유럽여행을 꿈꾸는 등 매우 서구적 취향을 갖고 있었다.”1) ‘붉은 벽돌집’이란 일명 “푸른 집”으로 그가 평양의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살던, 넓은 정원 속에 숨어 있던 집으로 목욕탕과 지하실, 피아노가 놓인 거실, 침대가 놓인 침실 등이 있는 마치 '산장' 같은 집이었다 한다.


그렇다면 이효석이 커피를 사러 가고 싶다던 그 ‘백화점’은 과연 어디였을까? 당시 평양에는 화신상회에서  평안백화점을 인수하여 1935년 12월 1일 개관한 화신 평양지점이 있었으니, 아마도 그곳이 아니었을까? 평양 화신백화점은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자본주의의 산물이라 하여 철거되었고, 1982년에야 다시 그 자리에 평양제일백화점이 건축되었다. 서울 종로의 화신백화점 본점 역시 1988년 사라지고 현재 그 자리에는 라파엘 비뇰리라는 외국인 건축가가 설계한 종로타워가 건축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들어선 최초의 백화점은? 바로 일본의 대표적 백화점 미스코시 경성지점이다. 1906년 충무로 입구에 처음 문을 열었고,2) 현재의 위치(신세계백화점 자리)에 들어선 것은 1930년의 일이다. 당시 일본인 거리였던 본정통((현 충무로) 일대에는 순 일본인 경영의 조지야, 히라다야, 미나카이 등 일본인들이 경영하는 백화점들이 입지했다.


이때 백화점 사업에 뛰어든 한국인 사업가가 바로 박흥식(朴興植, 1903~1988)이었다. 평안남도 용강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부터 상업분야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1926년 선일지물주식회사(鮮一紙物株式會社)를 설립하여 자본을 축적하여 1930년대 중반 화신(和信)의 총수로 성장했다. 이 시기 조선의 상권은 일본의 자본과 조직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예외적으로 참여해서 활약했던 사람이 바로 박흥식이기 때문에 그의 사업가적 업적에 대하여 ‘민족 자본’의 자긍심을 지켰다는 평가와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총독부 지배권력과 결탁한 ‘매판 자본’이라는 시각도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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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총독부 정책 및 경제여건에 재빠르게 적응했고, 총독부 관료 및 일본인 기업인들과의 유대관계 형성에 노력했다. 1938년 이후에는 조선총독부의 강요에 따라 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 설립하는 한편, 1942년에는 일왕(日王)을 만나 ‘대동아전쟁 완수에 전력을 바칠 것’을 맹세하기도 했다. 이러한 친일행위로 정부 수립 후에는 반민족행위처벌법 제4조 7항의 ‘비행기 ·병기 ·탄약 등 군수공장을 경영한’ 죄로 최초의 구속자가 되었다가 풀려났다. 박흥식은 그러한 자신의 행보에 대해 “친일과 위일은 다르다”고 해명했다.


1932년 종로네거리 모퉁이에 있던 화신상회를 인수, 화신백화점을 설립한 박흥식은 같은 해 바로 옆 건물의 동아백화점을 인수했다. 두 건물 사이에 육교를 가설, 양쪽을 오가면서 쇼핑을 할 수 있도록 하고, 당시 시인으로 이름을 떨치던 주요한과 소설가 조벽암에게 광고업무를 맡기는 등 화신백화점은 순식간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 다음 전국의 주요 잡화점을 사실상 화신의 지점으로 하는 연쇄점을 구상하는 등 그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경영방식을 구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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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목조 건물 4층 270평 규모이던 화신백화점에 큰 화재가 나자 즉각 부흥계획에 착수한 박흥식은 1937년 연면적 2000평이 넘는 지하 1층 지상 6층의 거대한 규모로 새 백화점을 완공한다.3) 여기에 설치된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도 화제가 되었다. 당시 경성의 조선인들은 일요일에 가족과 더불어 화신에 가서 엘리베이터로 6층에 올라가 비빔밥을 먹고 돌아오는 것이 최고의 나들이였다. 창경원과 함께 서울의 최고 명물이 되어 당시 서울 인구의 80%가 이 건물을 구경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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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는 박길룡(朴吉龍, 1898~1943)이다. 한국 근대건축의 기틀을 잡은 건축가로 평가되는 박길룡은 경성공업전문학교에 김정현, 이기인(李起寅)과 함께 입학, 1919년 건축과를 1회로 졸업한다.4) 이듬해인 1920년 조선총독부에 건축 기수(技手)로 들어가서 청사 신축공사에 실무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1920년에서 32년까지 12년 동안 총독부에서 활동하면서 나름대로 일본인들에게 역량을 인정받은 박길룡은 1932년 총독부의 기사(技師, 건축물을 실제로 세우는 관(官) 기술자의 최고위 호칭)직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이틀 만에 기사직을 버리고 바로 박길룡건축사무소를 개설하여 그의 이름을 건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의 작품 경향은 부분보다는 전체 분위기를 강조하는 것으로서 당당하며 당시로서는 매우 세련된 건물들이었다. 화신백화점 외에 경성제국대학 본부(1931, 총독부 공동설계), 동일은행 남대문 지점(1931), 평양 대동공전 교사(해방 뒤 김일성대학 교사로 쓰임), 혜화전문학교 본관(1943), 이문당(1943, 옛 신민당 당사로 쓰임) 등의 작품을 설계했다. 또한 주거에 대한 문화·개량·위생운동을 벌이고 신문·잡지 매체를 통해 건축 계몽을 벌인 점, 또 종로 일대를 중심으로 여러 근대식 빌딩을 세워 나감으로써, 당시 한국 건축은 나름대로 자발적 건축 활동의 기반을 만들 수 있었다.


당시 박길룡과 함께 총독부에서 근무했던 한국인 건축가 중에 김해경(金海卿, 이상(李箱), 1910~1937)이 있었다. 그는 1927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했다. 1929년 4월 당시 경성고공 건축과장이던 오가와 히로미치의 추천으로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에 기수로 들어가서 4년 동안 일했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조선과 건축〉의 표지도안현상공모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되는 등 그림과 도안에 재능을 보였다. 〈오감도〉·〈삼차각설계도〉·〈건축무한육면각체〉등의 시에서 그가 학습한 근대건축 및 기하학, 상대성이론 등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오른쪽 끝 이상, 오른쪽에서 네번째 박길룡)


이상은 1933년 각혈로 퇴직한 후 황해도 백천온천에서 요양하다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금홍을 만난다. 그 뒤 다방 '제비', 카페 '쓰루', 다방 '식스나인' 등을 경영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1934년 김기림·이태준·박태원 등과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했으며, 1936년 구인회의 동인지 〈시와 소설〉을 편집했다.


동시대의 문인이지만 앞서 본 이효석의 글에서는 식민 현실의 그림자를 그다지 엿볼 수 없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일제의 치밀한 검열 탓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한계 속에서 30년대를 대표하며 뚜렷한 족적을 남긴 시인 이상이 결정적으로 명성을 얻게 된 계기는 1934년 <오감도>가 《조선중앙일보》에 발표됨으로써였다.


<오감도, 詩第一號>는 건축용어인 鳥瞰圖(조감도)를 오감도라고 한 것인데, 제목뿐 아니라 띄어쓰기를 하지 않아서 시 전체가 마치 건축의 설계도와 같은 느낌을 준다. 이 시에서는 13명의 아이들이 공포에 사로잡혀 막다른 골목을 향해서 뛰어가는 장면을 제시해 준다. 지역적 공간의 제약성보다는 시대 전체가 일제에 의해 자유와 미래가 봉쇄된 극렬한 공포 시대임을 밝히고 있다.


김기림은 <이상의 모습과 예술>에서 “아담한 온대가 야만한 제국주의의 유린을 받듯, 시가 소박하고 유치하고 지저분한 감정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그는 못마땅히 여겼던 것이다. 인생의 어떠한 격멸한 장면에서도 그의 시와 生理는 늘 평균 체온보다 몇분 도리어 낮은 체온을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다.”라며, 이상이 재래의 시 작법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화술을 스스로 창조해냈다고 적고 있다. 특히 소설 〈날개〉는 내용의 난해함과 형식의 파격성으로 인해 1930년대 한국소설 가운데 하나의 전형을 이룬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뚜우, 하고 정오 싸이렌이 울리고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 날개의 주인공이 일어나 한번만 더 날아보자고 외쳐보고 싶었던 곳도 백화점, ‘미쓰꼬시’의 옥상이었다.


미스코시 백화점 경성지점은 1926년 경성부청이 현 서울시청사 자리로 이전해가자, 그 자리에 일본인 건축가 하야시의 설계로 연면적 2,252.88평,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절충식 르네상스 스타일의 새 백화점을 지어 1930년 완공하였다. 이 백화점이 들어서면서 종로의 상권은 몰락을 가져왔다.


“…상업을 하더라도 가령 미스코시 같은 데를 가보십시오. 그 사람들은 많은 돈을 들여서 상품을 여러가지로 또 많이 사다 놓고 팝니다. 그러니 상품 한 두가지나 조금씩 내놓고 파는 상점보다 손님이 많이 옵니다. 또 파는 물건 뿐 아니라 설비에도 많은 돈을 들였습니다…”5)


1931년 4월 발간된 잡지 <혜성>에서 경제평론가 서춘은 ‘조선사람 빈궁의 실지적 7대 원인’이란 제목의 글을 통해 전해 새로 개장한 미스코시 백화점이 일으킨 유통 혁명을 이렇게 묘사했다. 미스코시란 이름은 우리 근대 유통사뿐 아니라 식민지 조선 사람들의 시각문화와 근대 인식을 뒤바꾼 전환기적인 상징어로 역사에 남게 된다.


당시 경성 남촌의 대표적 건물인 조선은행, 경성우편국과 남대문통 대로를 두고 삼각형 랜드마크를 형성한 이 백화점은 무엇보다 쇼윈도우와 엘리베이터, 그리고 경성의 최고 명물로 손꼽힌 옥상정원으로 유명했다. 지방과 서울 변두리에서는 굶어죽는 자와 동사자가 속출했던 시절 비참한 서민 생활과 대비되는 미스코시의 소비문화는 지식인들에게 생산을 외면한 식민지 소비문화의 모순을 고민하게 했다.


미스코시 백화점은 해방 이후에는 동화백화점으로 개칭 사용되었고, 6.25 당시에는 미8군  PX로 쓰여졌으나 서울 수복 후 곧 민영화 되었다. 스물한 살 처녀 박완서가 미군 초상화를 그리며 살아가던 화가 박수근을 만난 곳, <나목>의 배경이 되었던 곳도 바로 이 곳이다.


삼성이 1963년 동방생명을 인수하면서 당시 동방생명의 소유였던 동화백화점도 함께 삼성에 넘어갔다. 97년에는 계열 분리가 되면서 신세계백화점은 신세계그룹에 남게 됐다. 2002년 재개발 공사에 들어가 2005년 8월, 신관을 개장하였고, 2007년 2월말 3,500평 규모로 리모델링되어 강북 최고의 명품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외관의 경우 인근 한국은행 등 근대식 건축물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짙은 갈색의 화강석을 덧씌웠을 뿐 원형은 그대로 유지했다. 신세계측은 “구관에 대한 역사적 보존 가치가 높아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는데, 특히 건물을 허물지 않기 위해 기존 건물에 ‘마이크로 파일’을 박아 공중에 띄운 상태에서 공사를 진행했다.


근대 소비문화를 상징하는 두 백화점, 화신과 미스코시의 명암은 이렇게 엇갈린다. 문화재청에서 2002년 근대문화유산 등록을 추진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유주의 반대로 유보된 일본 자본의 흔적 미스코시는 굳건하게 본래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반면 화신은 일제시대 최고의 조선인 기업가의 터전이자 최초의 서구적 건축교육을 받은 한국인 건축가의 기념비적인 대표작임에도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하고 1988년 재개발 사업에 의해 사라지고 잊혀졌다.

 

 

건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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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절 -♡-
-♡- 2 절 -♡-
    
    1.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저 하늘 저 산 아래 아득한 천 리 
    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 
    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2. 
      고향이 떠나온지 몇몇 해던가 
      타관 땅 돌고 돌아 헤매 도는 이 몸 
      내 부모 내 형제 그 언제나 만나리 
      꿈에 본 내 고향을 차마 못 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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